아침에,
내가 끓여 놓았던 미역국을
'내가' 데워서 먹었다.
혼자 있을 땐 스스로가' 당연'했지만,
같이 살게되니 스스로가 '대견'해졌다.
어바웃 레스트 나잇,
마트에서 장을 좀 봤다.
'좀 봤다'는 심마니의 '심봤다.'와는 괘를 달리한다.
전자는 소비고
후자는 소득이다.
혼자 살때는 같이 장을 봐도 내가 고른 것들을
그녀가 계산한대로 입금해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같이사니 눈치가 보인다.
반을 나누자니,
사람 숫자가 안맞아 본전 생각이 나고,
내 몫을 정확히 셈하자니 짜보인다.
그래서 두당으로 나누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은 그게 그나마 합리적이지 않을까하고.
나는 생각했다.
다이어트가 지나간 후,
나는 아침을 꼭 먹는다.
아니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노력은 실천을 전제로 하기에
결국 아침을 먹게 되는 생활 패턴에 나를 흡수케 한다.
(흡수케 한다. 가 말이 되는 문장이냐?)
며칠 된 국을 데운 것은 내가 만든 국이 딱히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마냥 대기해 놓아두면 상할까봐 겁이나서도 아니다.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요일 저녁에 이어 화요일 아침까지
미역국의 연속이었다.
내가 미역국을 만드는 것은 그날그날 재료나
기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는 비슷한 편이다.
건미역을 물에 담궈 생기를 준 후 쥐어 짠다,
달군 냄비에 들기름을 양 껏 넣고,
간 마늘을 좀 볶다가
미역을 넣어 마져 볶는다.
소고기가 몇 점 있다면 핏물을 뺀 후에 같이 볶아준다.
그 후에 육수를 붓던지 물을 넣어 한소끔 끓인다.
냄비가 뚜겅을 빼꼼히 열어 뜨거운 김을 토해내면
후추와 소금간을 한다.
맛있다.
미끌미끌한 미역은 목넘김이 기묘하거든.
어떤 긴 미역을 삼킬때는 입으로 처음 넣는 부분이 십이지장에 도달해도
마지막 부분은 아직 내 국그릇에 담겨 있을 때도 있어.
그럴때는, 마치
미역으로 내시경을 하는 것 같아.
하하하.
하하.
하.
그녀가 밤사이 끓여 놓았던 순두부찌개가 먹고 싶어 가스불을 켰다.
미역국도.
하지만, 눈을 비비고 부엌으로 나온 그녀가 스톱이라고 외친다.
할 수 없이 미역국만 먹기로 했다.
잠깐 이의를 제기했지만 기각당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순두부찌개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내가 아직도 혼자 사는 게 아닌가 싶다.
혼자 살 때는 내가 하는 요리든 누가 해서 내게 건내주었던 요리든
그게 우리집에 있으면 내가 먹을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응중이다.
여럿이 산다는 것은 어렵다.
혼자 살았던 인간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가끔 그녀의 부모님댁에 다녀온다.
공기 좋은 곳에 사시는 부모님들의 고민은
건강과 외로움이다.
두 분이 식사를 하실 때는 순서가 중요치 않지만
딸과 그의 친구가 방문하면 상황이 급변한다.
어머님은 끼니때 밥을 푸실때마다 경쾌하게 말씀하신다.
'아버지' 꺼.
그러하다.
식구란 서열이다.
서열은 나이순이며,
존경은 나이와 밀접하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며
내가 얼마나 오래 혼자 살았나. 하고 나를 살핀다.
그리고, 아버님은 밥 푸는 순서의 탑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을까.
하는 생각.
을 해 본다.
자,
나는 왜 까칠할까.
차를 몰고 그녀의 직장 뒷 편 주차장에 후면 주차를 했다.
일일이 차 앞으로 와서 따지기도 귀찮은 경비 아저씨가 부쓰에 엉덩이 뭉게고 앉아서 머리만 내밀고
내 미래 행적을 묻는다.
나는 설명을 마치고 메씨지들을 다시 확인한다.
메씨지 1
올 때 쇼핑백 챙겨 올 것.
메씨지 2
전 날 만들어 두었던 식빵을 싸올 것.
메씨지 3
두유도 챙겨올 것.
나는 일단 1번과 3번이 차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2번은 준비를 못했다.
그냥 식빵이라니 안될말이다.
8시까지 저녁없이 아이들과 씨름한 그녀가 아닌가.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나온 지폐 몇 장을 들고 근처를 헤매다가
할 수 없이 편의점을 습격했다.
계산을 하고 시계를 보니 8시 5분.
나올때가 되었다. 서둘러 샌드위치를 레인지에 넣어 따끈하게 만들고 있자니
전화다.
어디야?
뒷 편 주차장.
차에 도착해 시동을 거니 그녀가 모습을 들어낸다.
자, 이거 먹어 따끈해.
왜?
뭐?
식빵은?
아.
왜?
왜라니?
혼자 살아온지 오래되면서 나는 어딘가 모르게 사회에서 괴리되어왔던 터였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등장하면 적잖히 당황하고
그 당황은 쉽게 화로 변화한다.
일종의 자기방어다.
왜라기 전에 아리가또 아닌가.
순간 몸에 휘발류를 붓고 성냥을 당기는 듯한 열이 느껴졌다.
왜일까.
왜 내 선의는 번번이 묵살되는가.
왜 내 선의는 늘 타인에게 악의로 변질되는걸까.
나는 결국 복수의 일원으로 부족한 부류일까.
단수가 내 삶의 모든 것일까.
단수로서의 삶이 궁극의 나일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김가씨말대로 까칠버트일까.
그렇다면,
나는 대체 왜 까칠한걸까.
이다지도말이다.
태그 : 나는 왜 까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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