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 - 느림보 영화

영화 2006/08/05 13:00 Posted by 버트

깃 2005

느리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현대인에게는 느림이 일종의 철학이다. 과거인들은 빠름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빠름을 칭송하는 것은 나중일이었다. 현대인들은 느림을 칭송하지 않는다. 하지만, 빠름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을 낙오자라고 칭하기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10년을 기다린다는 것. 상상할 수 없다. 느리다 못해 지겹기까지 시간이다. 사랑이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얼마일까. 그런 생각을 본다. 그렇다고 10년을 한결같이 단 한 사람만 생각한 것은 아닐게다. 이유가 되지 않아. 지독한 핑계다. 어찌어찌하다보니까 그렇게 되었다가 정상이다. 신경쓰지 않고 8-9년 보낸다. 그러다보니 마침내 10년째가 되었고, 줄곳 자신이 십년후에 만나자는 치기어린 약속에 조금씩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도다. 그곳으로 23살에 여행을 떠난 어린 커플은 십년을 기약한다. 십년. 문득, 나 역시 십년 나의 주변을 본다. 그곳엔 청춘은 이미 오간데 없고, 애 업은 기혼자들만 득실거린다. 현성의 주변도 매한가지다. 잘 풀렸으면, 그가 느리지 않고 남들처럼 바삐 살아갔다면, 애 업은 기혼자는 자신의 몫일 수도 있는 나이다. 그는 우도로 간다.

영화감독. 느린 직업이다. 많으면 1년에 단 한작품 한다. 러시아의 어떤 감독은 53살에 데뷔를 해서 깐느에서 박수를 받기도 했다. 느리다. 집에 머물다가 53살에 갑자기 삼성전자에 사장으로 입사하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는 느림이 먹히는 직업이다. 느리게 준비해서 느리게 데뷔해도 누구하나 그가 빠름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라고 비아냥 거리지 않는다.

현성은 십년 묵은 사랑과의 재회를 기대하기보다 어쩌면 십년 묵은 과거를 소멸시키기 위해 우도를 찾은 지도 모르겠다. 그곳엔 십년 전 자신과 함께 한 사랑이 있다. 새로운 사랑이라. 적어도 과거의 그녀와 나이가 흡사했다. 우도는 현성에게 늘 새롭다. 십년이 지나 다시 왔는데도 자신만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별로 낙심하지 않는다. 느림의 미학을 아는 이에게는 사고도 천천히 흐른다. 그런 것이 충격으로 작용하는 사람들은 세월을 거스르는 빠름쟁이들 뿐이다.

소연. 어째서, 남도에 틀어박혀서 이미 기성세대로 진입한 아저씨 현성따위에게 호감을 갖는걸까?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 둘은 결국, 1년 후에 서울에서 재회하기로 한다. 과연, 띠 동갑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그들 앞에 펼쳐질까? 생각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영화는 우도 앞에 펼처진 바다처럼 열려있다.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사랑이 다시 시작한다고 한들, 그들이 살아가는 속도는 우도의 시간만큼 느리게 흘러가길 바랄 뿐이다.


by 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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