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내가 일하는 회사의 공장에도 그들의 몇몇 (또는
우즈벡키스타니)
이 한국인보다 적은 급료를 받고 한국 사람들보다 많은 시간 노동을
한다.
그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기를 영화를 보는 내내 기원했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코미디영화로 만들어 미국 내 지식인들을 즐겁게 했던 M.A.S.H가 떠오른다. 물론
그들이 참전했다가 공식적으로 깨진 전쟁인 베트남전을 한국전쟁에 투영해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보아도 꺼림칙하긴 마찬가지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국, 즉 미국을 까발리는 통쾌한
블랙 코미디라고 구구절절이 선전을 했던 영화치고는 영화내용이 못내 석연치 않다. 결국
그러한 타자의 시선을 차용해 자신을 비판하는 행위가 실제로 그 타자의 성격을
너무 희극화한 나머지 블랙코미디라기보다 불쾌하고 유치한 어정쩡한 영화가 되고 말았다.
미국이 자신의 나라를 까발릴 타자로 힘없는 중앙아시아의 신생독립국을 선택했다는 것이 즐겁지
않다. 영국이나 스웨덴, 캐나다로 설정하지 않는 이유는 뭐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을 터. 또 중앙아시아의 종교적 특색. 즉 주인공 보랏의 콧수염이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를 희극화해서 그 나라의 낙후성과 비례한 문화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비교하는
것은 보는 내내 나를 괴롭게 했다.
이 영화를 보고 즐겁게 웃을 수 있는 민족은 얼마나 될까. 적어도 중앙아시아와 같은 신생독립국이나 한국처럼 과거의 역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개발도상국은 아닐 것이다. 유쾌한 백인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보랏의 저질 사이코 행각에 자유로울 수 있는 나라. 미국은 이처럼 중동의 캐릭터를 동원해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을 긁어주는 도구로 사용할 줄 아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다.
한국의 정서로 미군의 환경오염이 발단이 된 SF 영화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하는 것이 그것에 대한 반증이다. 왜냐하면 타자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신을
씹을 순 있다 해도 그 영화를 타자의 자본으로 만드는 것은 곤란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뿐인 것이다.극적
재미를 이끌기 위해 동양 출신의 호스트를 기용할 순 있어도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 스스로임을 잊지 않는다. 그것이 미국이 자랑하는
자정능력이고, 영화를 통해 자신을 비판할 줄 안다고 으스대는 미국의 놀라운 저력인
것이다.
최근에 본 가장 토할 것 같은 영화.
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