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기 시작한 인간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을 보라. 세상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인간들은 지금 죄다 바꾸기를
원했던
세상 안에 안착해 바꾸기를 원했던 세상의 중심에 들기 위해 오늘도
안간힘을
쓰며 살고 있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은 그들의 일과이며 자신이 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변한 것이라 강변한다.
김윤영의 소설집 ‘루이뷔똥’을 보면 그러한
변절자들이 늘어나는 세상에 변하지 않고 과거를 고스란히 등에 지고 살아가는 낙오자(변절자들의
시각에서 보면)의 삶들을 담아 내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심한 후유증을 앓고
좋든 싫든 가족의 눈칫밥을 먹고 산다.
서장원이 연기하는 승영은 김윤영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386의 찌꺼기들과 유사하다. 요컨대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살다가 결국 그런 사회에 녹아들 수밖에 없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우리는 왜 늙으면 점점 꼴통이 되어가는 것일까. 자기 자신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어째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승진을
하면서 점점 타인보다 개인의 부귀영화나 권세에 집착하는 것일까.
억지로 군대에
끌려가는 한국의 젊은 청소년들은 합법적으로 남을 살해하는 기술을 배우기에 앞서 먼저
합법적인 틀에서 타인을 길들이는 작업을 배운다. 이유는 없다. 단지 선임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군화에 물광을 내는 방법을 가르쳐 줄게. 먼저 물을
살살 뿌리고, 그 다음 약을 발라서 천천히 문질러 광을 내는 거야.
그럼 아주 반짝거리는 광이 나게 되는 거지.”
어느새 군대에 말뚝
박아도 살 정도의 적응력을 키운 태정(하정우)가 중학동창인 승영이에게 친절하게 군화 광내는
법을 가르치는 씬이 재밌다. 승영이 어째서 그렇게 하면 더욱 광이 잘나냐고
말하자, 태정은.
“너 물하고 기름이 뭐야. 안 섞이지? 그니까 안
섞이려고 발버둥을 치다보면 열이 발생해 광이 더욱 잘나는 거야.”
하고
씨도 안 먹히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나도 몰라. 그냥 이렇게 하면 광이
잘나더라. 고 말하면 그만인 것을 구태여 비과학적인 논리를 늘어놓는 태정의 머릿속에는
동창이지만 승영은 싹수 노란 고문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알다시피 인간은 누구나
제가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일을 할 때,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물어보면
당황하게 마련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행동에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의 성의를
환대하고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당황하고 경멸하는데 있다.
수학선생이 자신이 모르는 문제를 집요하게 질문하는 학생을 싫어하기 시작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가장 논리적인 분야를 가르치는 선생도 그럴진대 군대는 어떨까. 까라면 까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그러한 군대적 속성은 그러한 집단을 거쳐서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일단 까라면 까는 사회. 그것을 얼마나 토 달지 않고 정성껏 가져다 바치는 것에 부하의 능력을 판가름하는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떤 긍정적인 마인드가 생성될 수 있단 말인가.
태정이 승영의
자해를 발견하고 곧바로 신고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자신의 치부를 영원히 봉인하기
위한 하나의 자기방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자신이 폭력 앞에 굴복한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것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친구가 죽어감으로서
자신의 과거를 말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어리석은 동물이다. 자신의 잘못을
공론화하는 것은 여남소노를 막론하고 두려워한다.
용기 없는 인간. 제목 용서받지
못한 자는 그런 의미로 용기를 갖고 세상을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 용기를 잃어버리고 급기야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되어 가는지를 군대라는
대표적인 패쇄적 공간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머리 좋은 영화가
불과 이십대의 어린 청년의 손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젊은 감독의 엄청난 내공의 대뷔작.
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