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사람들은 때론 죽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 결심은
곧
흔들리고 만다. 빌어먹을 자기연민이 문제다. 지금까지 살아 온 시간이 아깝다거나,
그래도
좀 더 시간을 보내보면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얼토당토 않은
낙관주의가
인류의 인구수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십대 나이에 정신병원에
들어
온 토와(마키 요코)는 낯선 장소에서도 안하무인이다. 자기 연민을 넘어선 타인
혐오는
어느 장소에서도 겸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브라질 작가의 원작대로 담당의는
그녀에게
희망을 주기보단 절망을 주는 요법을 시행한다. 덕분에 그는 변해간다.
희망은
사람의 삶을 연장 시킨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실체화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능력이다.
희망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우리에게 희망은
도대체
어떤 메타포를 의미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 정신병원에 들어왔는지 설득력들이 전부 부족하다. 김태희의 동생으로 알려진 남자배우는 어째서 일본에서 활동하는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일본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병원은 알수없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풍만하고 그러한 낙관주의와 인간의 창조물 '희망' 이라는 단어에 어울려 영화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지루한 공간을 만든다.
구태여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까지는
몰라도 된다. 적어도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한 '케이펙스'를 단 한 번만
보고
만들었어도 이것보단 뭔가 의미가 있는 영활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보는 내내 들었다.
수면제보다 치명적인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