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이던가,
혼자 명절을 보내는 것이 두려워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결혼 적령기를 지나면 그럭저럭 극복할 수가 있지 않을까는 생각으로 명절을 버텼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런 의미로서의 애인을 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지) 애인이 탄생했다. 누구나 애인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라고 자위하며 나도 애인다운 애인을 몇 십년만에 만났다. 그렇다고 그가 내 빈 명절을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평소 애인과의 교감을 무기삼아 명절을 극복해 내리라 믿었다. 막연한 생각이었다.
어느 날,
자신의 피씨가 고장났다고 투덜대는 그의 목소리를 전화로 들었다. 그날은 몹시 피곤하고 지친 하루였었다. 그날 보스와 진절머리나는 언쟁을 벌인 후라 더더욱 피곤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싸구려 이론가가 자신의 보스를 격파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피씨의 에프터 서비스는 무능한 애인의 몇 안되는 스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내가 판매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A/S는 대개 판매자나 생산자가 하지 않는 법이다.
카메라를 들고 갔었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비 개인 하늘이 예뻤던 것일지도 모른다.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던 터라 모처럼 일찍 끝나서 집에서 쉬려던 계획이 풍비박산 났다. 더구나 집에 일찍들어가려던 그의 계획도 차질이 왔다. 초조했다. 피씨를 고장 낸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또한 나는 당신 사무실에 피씨를 납품한 사람이 아니니 A/S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열심히,
자신의 동생에게 어떤 부탁을 하기 위해 동료의 사무실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몇 가지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걸고 설치하기를 반복했다. 알다시피 컴퓨터가 빠르다고 하지만 인스톨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평일 낯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그의 오피스를 찍었다. 그것이 이 사진이다. 나는 그가 여기 앉아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지 잘 알지 못한다. 아이들이 몰려올 시간에는 아마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여유가 없는 직업인 것이다.
문득,
빈방을 찍은 이 사진이 떠 올랐다. 딱히 이런 어스레한 글을 쓰기 위해 몇 달 전에 찍어 놓은 사진은 아니다. 그저 그 사진이 떠올랐다. 그가 아이들의 발달을 돕는 그의 작업실이자 사무실. 가까운 곳에 러브호텔의 네온싸인이 선명한 곳. 멀지 않은 곳에 전철 노선이 솟아 있어 일정한 시간마다 승객을 실어나르는 전철이 보이는 곳. 아이들의 손 때가 묻은 장남감과 그의 시린 어깨를 덮어주던 검정 카디간. 평범한 의자. 카페트. 책상. 서류. 책. 내가 선물해준 소형의 쵸코 벤딩머신. 멀리 타국에서 보낸 선물을 막 받았다고 방금까지 즐거워 하던 그의 기운. 그런 것들이 적당히 뿌려져 머물러 있는 곳.
내가,
머무는 이 곳에도 그런 흔적은 무수하다. 그의 몫으로 몇 년전 사준 호피무늬의 싸구려 실내화. 그가 입던 반바지, 티셔츠. 그가 여름 훗카이도 여행에서 사다 준 글렌 피틱의 15년산 몰트 위스키. (물론 빈병, 한가위에 작살냈기에) 그와 함께 해 먹었던 야키소바 소스통.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해주겠다고 했던 번역안된 그의 텍스트들. 그리고 내 방 벽면 가득한 그의 사진들. 지금도, 텅 비어있을 그의 오피스. 그의 빈방. 그리고 내 집. 내 방. 이런 제길. 대단하지 않은가? What a coincidence! 그가 떠나간 모든 방은 결국 빈방일 뿐이다. 나역시도 그저 사물인 것이다. 카디건인 것이다. 마우스인 것이다. 냉장고인 것이다. 미키 마우스가 수 놓아진 방석인 것이다. 유동적인 힘을 가진 나도 움직임을 박제당해 오도카니 빈 방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십 수년전에 내가 느꼈던 명절에 대한 곤혹스러움과의 다름이다. 그것의 차이는 미묘할지 몰라도 그것이 내게 가져다주는 깊이 솔직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밑이 보이지 않는 오래된 우물에 무심코 돌을 던져봐도 이젠 더 이상 그 돌이 바닥에 부딪혀 울리는 파열음을 들을 수 없어진 것이다. 바닥 없는 우물. 무수한 짱돌을 아무리 바닥을 향해 던져보아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우물. 들리지 않는 돌과 바닥의 마찰. 중력이 사라진 우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말이다.
그래도 예전엔.
바닥을 튕기는 메마른 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작고 둔탁한 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소리라는 형태를 띈 확실한 물리적 현상이었다. 나는 심연이 아니었으며 동시에 그 바닥이 분명히 들어날 그런 종류의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때의 내가 아니다. 나는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익숙한 소리들을 찾을 수 없다. 그곳엔 무수한 돌팔매를 당해도 소리내어 울수 없는 벙어리 앉은뱅이와도 같은 모습의 우물이 존재한다. 구슬픈 모습이다. 벙어리에 앉은뱅이라니. 구약성서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 아닌가. 하지만 현대에도 그런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의학의 발달은 시대를 앞서 왔다. 하지만 그 발달의 혜택은 늘 발달을 주도한 사람들의 몫일 뿐이다. 발달과 관계없는 존재는 그 어떤 혜택도 누릴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존재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리고 그 과학의 틈 새에 작고 낡은 우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닥 없는 우물 말이다.
혼자 명절을 보내는 것이 두려워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결혼 적령기를 지나면 그럭저럭 극복할 수가 있지 않을까는 생각으로 명절을 버텼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 (그런 의미로서의 애인을 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지) 애인이 탄생했다. 누구나 애인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라고 자위하며 나도 애인다운 애인을 몇 십년만에 만났다. 그렇다고 그가 내 빈 명절을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평소 애인과의 교감을 무기삼아 명절을 극복해 내리라 믿었다. 막연한 생각이었다.
어느 날,
자신의 피씨가 고장났다고 투덜대는 그의 목소리를 전화로 들었다. 그날은 몹시 피곤하고 지친 하루였었다. 그날 보스와 진절머리나는 언쟁을 벌인 후라 더더욱 피곤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싸구려 이론가가 자신의 보스를 격파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피씨의 에프터 서비스는 무능한 애인의 몇 안되는 스킬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내가 판매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A/S는 대개 판매자나 생산자가 하지 않는 법이다.
카메라를 들고 갔었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비 개인 하늘이 예뻤던 것일지도 모른다.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던 터라 모처럼 일찍 끝나서 집에서 쉬려던 계획이 풍비박산 났다. 더구나 집에 일찍들어가려던 그의 계획도 차질이 왔다. 초조했다. 피씨를 고장 낸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또한 나는 당신 사무실에 피씨를 납품한 사람이 아니니 A/S에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열심히,
자신의 동생에게 어떤 부탁을 하기 위해 동료의 사무실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몇 가지 프로그램을 다운로드 걸고 설치하기를 반복했다. 알다시피 컴퓨터가 빠르다고 하지만 인스톨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그가 평일 낯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는 그의 오피스를 찍었다. 그것이 이 사진이다. 나는 그가 여기 앉아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지 잘 알지 못한다. 아이들이 몰려올 시간에는 아마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여유가 없는 직업인 것이다.
鬢房
빈방을 찍은 이 사진이 떠 올랐다. 딱히 이런 어스레한 글을 쓰기 위해 몇 달 전에 찍어 놓은 사진은 아니다. 그저 그 사진이 떠올랐다. 그가 아이들의 발달을 돕는 그의 작업실이자 사무실. 가까운 곳에 러브호텔의 네온싸인이 선명한 곳. 멀지 않은 곳에 전철 노선이 솟아 있어 일정한 시간마다 승객을 실어나르는 전철이 보이는 곳. 아이들의 손 때가 묻은 장남감과 그의 시린 어깨를 덮어주던 검정 카디간. 평범한 의자. 카페트. 책상. 서류. 책. 내가 선물해준 소형의 쵸코 벤딩머신. 멀리 타국에서 보낸 선물을 막 받았다고 방금까지 즐거워 하던 그의 기운. 그런 것들이 적당히 뿌려져 머물러 있는 곳.
내가,
머무는 이 곳에도 그런 흔적은 무수하다. 그의 몫으로 몇 년전 사준 호피무늬의 싸구려 실내화. 그가 입던 반바지, 티셔츠. 그가 여름 훗카이도 여행에서 사다 준 글렌 피틱의 15년산 몰트 위스키. (물론 빈병, 한가위에 작살냈기에) 그와 함께 해 먹었던 야키소바 소스통.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해주겠다고 했던 번역안된 그의 텍스트들. 그리고 내 방 벽면 가득한 그의 사진들. 지금도, 텅 비어있을 그의 오피스. 그의 빈방. 그리고 내 집. 내 방. 이런 제길. 대단하지 않은가? What a coincidence! 그가 떠나간 모든 방은 결국 빈방일 뿐이다. 나역시도 그저 사물인 것이다. 카디건인 것이다. 마우스인 것이다. 냉장고인 것이다. 미키 마우스가 수 놓아진 방석인 것이다. 유동적인 힘을 가진 나도 움직임을 박제당해 오도카니 빈 방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이,
십 수년전에 내가 느꼈던 명절에 대한 곤혹스러움과의 다름이다. 그것의 차이는 미묘할지 몰라도 그것이 내게 가져다주는 깊이 솔직히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하다. 밑이 보이지 않는 오래된 우물에 무심코 돌을 던져봐도 이젠 더 이상 그 돌이 바닥에 부딪혀 울리는 파열음을 들을 수 없어진 것이다. 바닥 없는 우물. 무수한 짱돌을 아무리 바닥을 향해 던져보아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우물. 들리지 않는 돌과 바닥의 마찰. 중력이 사라진 우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말이다.
그래도 예전엔.
바닥을 튕기는 메마른 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작고 둔탁한 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히 소리라는 형태를 띈 확실한 물리적 현상이었다. 나는 심연이 아니었으며 동시에 그 바닥이 분명히 들어날 그런 종류의 인간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 때의 내가 아니다. 나는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익숙한 소리들을 찾을 수 없다. 그곳엔 무수한 돌팔매를 당해도 소리내어 울수 없는 벙어리 앉은뱅이와도 같은 모습의 우물이 존재한다. 구슬픈 모습이다. 벙어리에 앉은뱅이라니. 구약성서에나 나올 법한 캐릭터 아닌가. 하지만 현대에도 그런 사람은 분명 존재한다. 의학의 발달은 시대를 앞서 왔다. 하지만 그 발달의 혜택은 늘 발달을 주도한 사람들의 몫일 뿐이다. 발달과 관계없는 존재는 그 어떤 혜택도 누릴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존재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과학이다. 그리고 그 과학의 틈 새에 작고 낡은 우물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닥 없는 우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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