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가 주는 무게감은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 나는 알지 못한다.
아오야마 신지의 영화가 뛰어난지 안 뛰어난지는 제처두고라도 미야자키 아오이가
나온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수 밖에 없다. 8년전 유레카에 출연했던
소녀
아오이는 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다시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인 이 영화에서도
모습을
들어낸다. 젖살이 울퉁불퉁하던 아오이는 어느새 젊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 자기 자신은 도대체 나이를 먹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듯이
달라진
아오이의 모습에서 젊은 날이 고갈되어 버린 내 뒷모습이 어쩐지 안쓰럽다.
헬프리스나 유레카를 보지 않은 관객들도 상관없다. 삼부작이라고 해 보았자 인생은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 잘못되어 감옥에 가게 되었다 해도 그는 결국 풀려나게 되는 법이다. 자신의 태생을 저주하고 자신을 떠난 엄마를 부정하는 켄지(아사노 타다노부)를 보면 몹시 안쓰럽다. 비단 내가 살아온 지난날과 오버랩이 되어서가 아니다. 다만 살아있는 존재를 인식한다는 게 죽어 없어진 것을 저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켄지는 엄마가 자신을 버린 점에만 주목한다. 인간은 알다시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살아간다. 그것은 대개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피곤하지 않은 것들이다. 아프리카 어디서 수만명이 죽어가는 뉴스보다 자신이 살아가는 집이 속한 동네의 땅값이 집단 상승한다는 뉴스에 감격해 한다. 자신이 속한 작은 세상을 떠난 시각은 오지랖 넓은 사람들의 몫일 뿐이다. 나와는 상관없다. 내가 속한 세상의 문제들로만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기 때문이다.
이해는 오해에 다른 표현이라는 말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도
뜻은
통한다. 오해는 이해의 다른 말이다. 누군가를 저주하고 증오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가는
피플들에게는 오해가 이해일 뿐이다. 이해한답시고 호들갑을 떨며 상대를 배려하는 척
하는
사람들의 독선에 지쳐 더이상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다.
소설도
쓰고
영화도 쓰며 이른 바 일본 영화의 젊은 바람을 일으킨 바
있었던
아오야마 신지도 이젠 더 이상 젊은 감독이 아니다. 켄지가 석방이
되는
해 그의 아이도 초등학교에 들어가듯이 그가 이번 3부작아닌 3부작을 끝낸것도
자신이
뉴웨이브와는 차별되는 평범한 감독으로 돌아가는 것을 알리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기다리 죠를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아사노 타다노부는 자신만의
색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금 식상하다. 오기다리 죠는 아사노의 식상함을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미야자키 아오이. 엊그제만 해도 소녀였는데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싶다.
그가 연기자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는 내내 했다. 이상하게
다른
일본 아이돌표 연기자보다 그가 마음에 든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쟈니
썬더스 동명 타이틀곡이 흐르는 오프닝 씬은 나름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