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미썸딩의 추억

영화 2008/05/07 17:09 Posted by 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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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미썸딩, 1999 한국영화

하드코어와 하드고어를 구별하게 해 준 영화로 기억된다. 고어무비의 팬들이나 고매하신 지식인들이야 쉽게 구별할 수 있는 단어겠지만 영어 단어라고는 고작 맛가다 stoned, 그것을 활용한 문장으로 마시고 죽자! Let's go get stoned 밖에 배운 나로선 역부족이었던 것. 그러나 정작 신체 훼손을 고어무비의 가치척도로 삼는 영화매니아에겐 웃기는 이야기였을 터. 초창기 피터 잭슨의 영화정도는 되야 간신히 고어무비라고 말해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들도 여럿된다. 그랬거나 어쨌거나 장윤현의 텔미썸딩은 여러가지로 내 기억에 한 구석탱이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 (내 기준으로 삼는 영화라면 미이케 다케시의 오디션정도면 어떨까싶다만 뭐)

영화가 중반을 넘어설 무렵 조형사의 집에 피신한 수연이가 사라졌다. 당황한 조형사가 개거품을 풀고 있는데 겁대가리도 없는 수연낭자가 비닐봉지를 들고 쫄래쫄래 집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눈에 쌍심지를 켠 조형사가 수연을 나무란다. 경찰이 이레적으로 민간인에게 권총까지 주며 자신을 보호하라고 했겄만 수연은 버젓이 동네점방에 나가 쇼핑을 하고 온 것이다. 아니 여자가 하는 심정으로 냅따 수연의 비닐봉지를 거칠게 낚아채자 안에 비닐이 찢어지며 거실은 순식간에 편의점이 된다.

조형사 - 총 왜 안가지고 다녀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를 해요!!!!!


이때가 압권이다 우리의 수연, 주인공 역할을 잘도 소화해 내는 심은하가 차분하다 못해 약간 정신이 나간 (당연하지 않은가 주위엔 그녀를 목표로한 살인마가 설치고 있는중이다) 것 같은 극도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딴소리를 한다.

수연 - 이 집엔 없는 게 너무 없어요.


그렇다. 적어도 피해자 신분으로 몰린 그녀의 보호를 자청했으면 집에 먹을거리라도 좀 사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범인을 피해 숨어있다가 굶어 죽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조형사 - 수연씨는 모든 걸 말하지 않았습니다. 희생자들에 관한 얘기조차 정확히 해준 게 없어요.
수연 - 오래 전에 헤어진 사람들인데 무슨 얘기를 해요?
조형사 - 서우진, 박현승, 권중현 모두 채수연씨가 먼저 헤어지자고 요구했습니다. 헤어지는데 쉽지 않았죠? 꽤 오랫동안 수연씨를 괴롭혔어요.
수연 - 괴롭혀서 그 사람들이 죽은 건가요? 그럼 나를 위한 살인이네요. 고마워해야 겠네요.


아니 이 여자가 냉소를! 조형사는 목소리를 높혀 거의 울부짓는다! 사건은 미궁이고 수연은 피해자지만 동시에 강력한 피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아직도 들릴 법한 명대사가 배우의 입 안에서 여름 소나기처럼 사정없이 쏟아진다.

조형사 - 수연씨가 만나는 사람들은 몇 안됩니다. 개인생활까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범인은 채수연씨에 관해서 본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 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받아치는 수연의 대사가 하이라이트!

수연 - 그럼 내가 범인이겠군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대사일지도 모른다. (물론 호들갑!) 대사를 영화에서 직접 들어보면 몹시 우스꽝스러운데 그것은 아마 아직 이런 장르의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의 거친 호흡과 연극과도 같은 과장된 톤에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사실 매우 중요하다. 영화를 보고 도대체 결론이 뭐냐고 짜증을 부리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유심히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조형사는 수연이 범임임에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비참한 과거와 (피의자보다 자신의 애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강력한 매력으로 공과 사의 대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수연도 조씨가 자신을 범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대단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 수퍼에 나가 유유히 시장을 볼 수 있는 자신감이 아니었나 싶다. 조형사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범인이 눈 앞에 있는 데도 쉽사리 체포할 수 없음이라기 보다 기싸움에서 이겨 자수나 자백을 받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항선을 테레비가 아닌 스크린에서 본 최초의 영화이고 또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 또는 강력반 고참형사나 반장의 케릭터를 개척한 영화로도 기억된다. 염정아의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또한 인상적이었던.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한 동안 조형사의 위의 인용된 마지막 대사를 친구들을 만나 지껄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제 더 이상 없는 심은하와 한석규의 조인트가 조금은 아쉽기도 한 영화다. 16mm 문화영화의 활발한 안방보급으로 한 때 털 밑 썸씽이라는 절묘한 제목으로도 회자된 화제의 영화였음을 누가 부인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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