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텔미썸딩, 1999 한국영화
영화가 중반을 넘어설 무렵 조형사의 집에 피신한 수연이가 사라졌다. 당황한 조형사가 개거품을 풀고 있는데 겁대가리도 없는 수연낭자가 비닐봉지를 들고 쫄래쫄래 집으로 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눈에 쌍심지를 켠 조형사가 수연을 나무란다. 경찰이 이레적으로 민간인에게 권총까지 주며 자신을 보호하라고 했겄만 수연은 버젓이 동네점방에 나가 쇼핑을 하고 온 것이다. 아니 이 여자가 하는 심정으로 냅따 수연의 비닐봉지를 거칠게 낚아채자 안에 비닐이 찢어지며 거실은 순식간에 편의점이 된다.
조형사 - 총 왜 안가지고 다녀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전화를 해요!!!!!
이때가 압권이다 우리의 수연, 주인공 역할을 잘도 소화해 내는 심은하가 차분하다 못해 약간 정신이 나간 (당연하지 않은가 주위엔 그녀를 목표로한 살인마가 설치고 있는중이다) 것 같은 극도의 침착함을 유지하며 딴소리를 한다.
수연 - 이 집엔 없는 게 너무 없어요.
그렇다. 적어도 피해자 신분으로 몰린 그녀의 보호를 자청했으면 집에 먹을거리라도 좀 사 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범인을 피해 숨어있다가 굶어 죽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조형사 - 수연씨는 모든 걸 말하지 않았습니다. 희생자들에 관한 얘기조차 정확히 해준 게 없어요.
수연 - 오래 전에 헤어진 사람들인데 무슨 얘기를 해요?
조형사 - 서우진, 박현승, 권중현 모두 채수연씨가 먼저 헤어지자고 요구했습니다. 헤어지는데 쉽지 않았죠? 꽤 오랫동안 수연씨를 괴롭혔어요.
수연 - 날 괴롭혀서 그 사람들이 죽은 건가요? 그럼 나를 위한 살인이네요. 고마워해야 겠네요.
아니 이 여자가 냉소를! 조형사는 목소리를 높혀 거의 울부짓는다! 사건은 미궁이고 수연은 피해자지만 동시에 강력한 피의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아직도 들릴 법한 명대사가 두 배우의 입 안에서 여름 소나기처럼 사정없이 쏟아진다.
조형사 - 수연씨가 만나는 사람들은 몇 안됩니다. 개인생활까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범인은 채수연씨에 관해서 본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알 고 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받아치는 수연의 대사가 하이라이트!
수연 - 그럼 내가 범인이겠군요!
한국 영화사상 가장 중요한 대사일지도 모른다. (물론 호들갑!) 이 대사를 영화에서 직접 들어보면 몹시 우스꽝스러운데 그것은 아마 아직 이런 장르의 연기에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의 거친 호흡과 연극과도 같은 과장된 톤에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이 장면은 사실 매우 중요하다. 영화를 보고 도대체 결론이 뭐냐고 짜증을 부리던 사람들은 이 장면을 유심히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조형사는 수연이 범임임에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비참한 과거와 (피의자보다 자신의 애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강력한 매력으로 공과 사의 대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수연도 조씨가 자신을 범인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대단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네 수퍼에 나가 유유히 시장을 볼 수 있는 자신감이 아니었나 싶다. 조형사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범인이 눈 앞에 있는 데도 쉽사리 체포할 수 없음이라기 보다 기싸움에서 이겨 자수나 자백을 받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항선을 테레비가 아닌 스크린에서 본 최초의 영화이고 또 그를 좋아하게 된 계기 또는 강력반 고참형사나 반장의 케릭터를 개척한 영화로도 기억된다. 염정아의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또한 인상적이었던.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한 동안 조형사의 위의 인용된 마지막 대사를 친구들을 만나 지껄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제 더 이상 없는 심은하와 한석규의 조인트가 조금은 아쉽기도 한 영화다. 16mm 문화영화의 활발한 안방보급으로 한 때 털 밑 썸씽이라는 절묘한 제목으로도 회자된 화제의 영화였음을 그 누가 부인할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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