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못하는 남자는 이유가 있다?

  • Posted at 2008/05/15 18:31
  • Filed under 일쌍
  • Posted by 버트
어느 날 케이가 내게 물었다.

- 왜 결혼 안하는거야?

몹시 귀찮고 예의 없고 질문자의 수준을 담박에 알아챌 수 있는 낮은 레벨의 질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침착하게 대답해줬다.

- 케이는 왜 결혼 한 거야?
- 나?
- 여기 당신말고 또 누가 있어?
- 까칠하긴. 나는 글쎄. 왜일까. 아마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순서에 입각했지 않았나 싶어.
- 이를테면?
- 이를테면, 친구들이 하나씩 사라지는거야. 내 바운더리에서 타인의 바운더리로 일종의 테리토리를 옮기고 다시 정착을 하는 거야.
- 그래서?
-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그래서 나 또한 그렇게 바운더리를 이동하고 새로운 테리토리는 확립했다는 것이지.
- 나루호도.
- 나루호도?
- 일본말. 과연. 이라는 뜻의.
- 아.


지천에 만발했던 꽃이 어느새 시들어 빠진 저마다의 화단엔 싱싱한 이파리가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바햐흐로 싱그러운 계절이 확립되고 있었던 것. 해마다 되풀이 되지만 전혀 질리지 않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 아, 말돌리기 없기야. 뭐야, 질문을 질문으로 맞받아치는 태도는.
- 그런가? 아 그래. 질문이 뭐였지?
- 결혼을 왜 안 하냐고.
- 아. 맞다. 결혼을 왜 안 하냐였지.
- 그래.
- 왜일까.
- 글쎄. 몰라. 내가 너냐.


나는 마른 기침을 의도적으로 두 번 정도 토해내 주의를 환기 시켰다. 그래봐야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은 케이와 다람쥐 한 마리 뿐이었지만 그래도 어떤 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어떤 종류의 바람잡기도 필요한 법이다.

- 나는 티비를 잘 보지 않아.
- 뜬금없다. 정말.
- 들어봐. 내가 티비를 보지 않는 이유를 알아?
- 대화면의 하이데피니션 티비를 살 경제적 여유가 부족한 탓?
- 그렇지. 그것은 자본주의적 이유. 하지만.
- 하지만?
- 다른 이유도 있어. 그것은 그 수상기 안에 너무나 많은 이상형이 존재한다는 것이지. 그게 나를 슬프게 했어. 나는 리모트 콘트롤러를 누를 때마다 늘 좌절하곤 했지. 온갖 방송에 전부 미녀들이 독식해 나가는 것을 두 눈 빤히 뜨고 바라 볼 수 없었던게야. 서운했던 것이지. 왜 나는 저런 쭉빵녀와 사귈 수 없냐라는 1차적인 이유보다 왜 내 주위엔 저런 쭉빵녀가 존재하지 않는가에 대해서 말이야. 그것은 크나큰 자괴감을 잉태했고 그 자괴감은 내가 티비를 살 수 밖에 없는 동기부여를 말살했던 것이야.
- 참 나. 그래서?
- 티비를 사지 않는 이유는 다시 말해 쭉방녀를 모니터로만 보고 실생황은 좌절녀와 두 손잡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근거한게지. 요컨대 현실과 이상을 좁힐 수 없었던 거야. 내가 시청료를 내고 티비를 보게 된다면 최소한 그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쭉빵녀 중 어느 한 사람정도는 내 근처를 실제로 배회해주기를 바랐던 거야. 그것은 위안이 아니야. 바람도 아니야. 다만 티비 수상기 안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던 셈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쭉빵녀는 티비 안에서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란 걸 알았어. 내 주위엔 모두 좌절녀만 가득한 것이 비로소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을 알았지.
- 맙소사. 너무 비관적인 거 아냐?
- 비관적? 그럴지도 몰라. 내 주위에 쭉빵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만을 놓고 볼 때 정말이지 그 말은 사실이야. 세상이 슬퍼지지. 주위엔 온통 거짓말이 난무해. 월급을 받으면 한 사이즈 작은 옷을 사고 싶어 몇번씩 옷을 걸쳐보고 내려놓고 반복하다가 다이어트를 시작하다 슬그머니 중단하고 자기 자신을 정당화 시켜. 자본주의에 자신의 몸까지 잠식당하는 것을 혐오하고 증오해. 자신이 애초에 쭉방녀가 될 수 없음을 무마시키고 현실속에 녹아들기 위해 무던히도 자신을 깍아내리지.


다람쥐는 사라지고 뜰 안엔 도토리껍질 몇 개가 굴러 다니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저녁을 알리는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리라.

-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묻겠다. 네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가 뭣이냐?
- 쭉빵녀를 사귈 수 없기 때문이지.
- 설마.
- 사실이야.
- 하지만 너 역시 훈남이나 얼짱도 아닌데다 하다못해 돈 좀 물려받은 인간도 아니잖아.
- 사실이야.
- 그런데 반드시 쭉빵녀를 원한다는 것은 웃기는 소리같지 않아?
- 질문을 하기 위한 것은 역시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 비판을 가하기 위함이었나?
-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인간을 그런식으로 평가하는 잣대는 부러뜨려 버리지 않으면 평생 결혼 못할지도 몰라서 걱정된다. 야.
- 말 그대로 야. 그게 답이기도 하고. 그래서 결혼 못하는 거야.
- 쭉빵녀를 사귈 수 없기 때문에?
- 그렇지.
- 세상엔 자기가 원하는 100% 이상형과 맺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더 허다해.
- 사실이야.
- 그럼 좀 바꿀 필요가 있지 않나?
- 뭘?
- 네 여성관을.
- 왜?
- 좁잖아. 편협하고 좋지않아, 아까도 말했듯이 평생 결혼 못하는 수도 있어.
- 사실이야.


대화를 마무리 할 때가 되었다. 피던 담배는 이미 꺼졌고 노을이 점령한 하늘이 대화보다 더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 아까 질문이 뭐였지?
- 왜 결혼 안하냐고?
- 거기에 대한 대답은 기억나?
- 응.
- 그럼 된 것 아니야? 아님 좀 더 네 설교를 들어야 할까?
- 아니 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저 붉게 물든 노을에게라도 프로포즈를 신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케이가 내게 퍼붓는 비난의 목소리가 좀 잦아 들지도 모를 일. 아니다.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때가 되면 또 이런 질문을 해 나를 괴롭힐지도 모르겠다.

- 어째서 사람이 노을따위와 결혼하지 않으면 안되는거야? 대체.


비난을 감추고 질문을 퍼붓는 피플들이 무서워지는 나이에 접어 들었다. 내 농담은 이제 시대에 뒤 떨어진지 오래다. 내가 중학교때 즐겨 들었던 로비 네빌 Robbie Nevil 의 노래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듯이 내 존재도 분명 그렇게 되어가고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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