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정국속에서도 우리는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곳에 서서 밤새 경찰과 대치하며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는 피플들도 있겠지만 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그렇지 못하는 피플들도
존재한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중은 아니었고. 요컨대 이런 이야기중,
나는 순간 속이 답답했다. 만약 그 기사가 넷심에 동조해 구국의 마음으로 청계광장에 나가 살기 좋은 나라를 위해 정의의 깃발을 흔들예정이 잡혀 있다면 과연 세상은 올바르게 흘러가는 중인 것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게, 왜 이런 일이 근절되지 않는 것일까. 버스를 평생 애용하다가 이제 몸이 불편해지신 분들에게 표창을 주지 못할 망정 어찌 짐짝 취급을 할까. 서민이 압도적으로 이 세상을 가득체우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어째서 약자인 자신이 약자인 타인을 업신여기는 일을 서슴치 않는 것일까. 그녀들이 고생해서 자식들을 출가시키면 그들은 절대 어머니에게 차를 선물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서민으로 살면서도 2000cc이상의 차를 폼나게 타고 다닐 꿈에 젖어 살지만 그가 지금 타고 다니는 1300cc 자동차를 위해 밤 낮으로 자기 부인과 자식들 엄마와 장모가 버스나 지하철로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을 왜 망각하는 것일까.
약자가 약자를 보듬지 않으면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는 법이다. 시민이 연대해서 엉망이된 정국을 타파하는 것처럼, 그 시민 그 연대로 사회적 약자를 품에 안을 순 없는 것일까. 버스에서 노인들이 그런 취급을 받을 때 그 누구 하나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고기파동은 내겐 가슴아프지만 너무 멀다. 노인이나 장애인으로 한정지어진 불합리나 차별엔 침묵을 지키던 시민들이 자신의 건강과 직접 연계된다고 생각하니까 분기탱천해 버리는 작금의 시대는 사실 내게 너무 먼 나라의 풍경같다.
소소한 시민들의 정의가 하나로 뭉쳐지면 올바른 시민의식이 정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수의 정의는 늘 다수의 이익에만 치우쳐 있음이 아쉽다. 모처럼 모아진 다수의 힘이 아무리 모아도 다수의 힘을 낼 수 없는 우리네 이웃들에게도 나누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지나친 것일까.
난폭운전자 버스노선 버스회사 처벌을 위한 촛불집회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 노인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새력들은 결국 우리자신인 것이다. 물론 내가 특정 버스기사를 나무랐다고 해서 내가 그 나무람의 궁극적인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다만 청계광장까지 나갈수도 없는 사람들에게도 다수의 시선이나 논리를 나누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정부가 수입하는 음식이 결국 소수의 정책입안자보다 다수의 시민들에게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했기에 청계광장은 열기가 가득해졌다. 고유가다 음주운전을 피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루 이틀 버스를 이용한 30대 이상 남성들의 불만이 그곳에 없다고 해서 평생동안 버스를 이용해 결국 이제 늙어 노인이 된 사람들을 함부로 여길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자가용을 굴리기 위해서 아내와 할머니들이 수십년을 버스만 타고 다녔던 것을 왜 늘 외면하는 것일까.
나로선 그런 것들이 늘 아쉽다.
- 요즘 지하철질을 때려치우고 버스질을 좀 하는데 참 가관도 아니야. 어찌나 진땀이 나는지 나 참.
- 아. 버스질 하니까 생각나는데, 우리 엄마.
- 어머니가 왜?
- 알다시피 울 엄마 상태가 몹시 올드하잖아. 노인 특유의 느림이 이미 확립된 몸 상태에 지병까지 있잖니.
- 그렇지.
- 버스를 세 번이나 놓치셨데.
- 왜?
- 처음엔 버스 정류소 푯말 앞에 서 계신거야, 의당 그래야 하는 것이잖아. 문제는 원하는 버스가 제일 먼저 오면 되는 데 현실은 늘 박복해. 쉽지가 않잖아. 나란히 두대 이상 동시에 도착하는 게 문제야. 원하는 버스가 두 번째에 서 있으면 그곳까지 이동하는 거리가 천리길인거야. 어기적 어기적 표현은 좀 뭣하지만 방금 항문관련 수술을 받은 환자가 퇴원 후 집에가는 모습 그대론거야. 몹시 느리지. 세상이 온통 자기자신의 생리적 수준에 맞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기사들에겐 답답할만도 하겠지. 멀리서 노인네가 천천히 버스를 향한다. 순간 갈등을 하지. 아, 저 노인네를 태우는데 1분 돈 받고 자리에 착석하는데 1분. 한 사람에 2분씩 승차시간을 주는 것은 고도자본주의 시대에 반하는 행동임과 더불어 동시에 개인적으로 볼 때 인내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기사는 순간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알아? 악셀을 밟는거야. 고개는 중앙차선 쪽으로 돌리고 말이야. 외면이지, 못 본체 하는 거야. 귀찮거든. 노인네가 보행이 시원찮으면 택시를 타던지 하지. 하며 자신에게 위안을 주면서 말이야.
나는 순간 속이 답답했다. 만약 그 기사가 넷심에 동조해 구국의 마음으로 청계광장에 나가 살기 좋은 나라를 위해 정의의 깃발을 흔들예정이 잡혀 있다면 과연 세상은 올바르게 흘러가는 중인 것일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 덕분에 엄마는 세 대나 버스를 놓치신거야. 아래로 가시다가 멍하니 한 번, 거기서 기다리면 이제 타야할 버스가 맨 앞에 가서 서. 그럼 최대한 전속력으로 (그래봐야 내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뒤로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겠지만) 푯말로 달려가시지. 그러면 버스는 매정한 전당포주인처럼 차갑게 문을 닫고 출발하는 거야. 화가나신게지. 너 같으면 어떨것 같아. 화가 나겠어? 즐거움이 솟아 오르겠어. 엄마는 마침내 4번째 버스에 간신히 오르고 나서 기사에게 지금까지 쌓인 불만을 토로하신 것이야. 대체 니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안그렇겠어? 그렇잖아, 이치가.
- 하, 참. 덕분에 애써 어머니를 태운 버스기사만 욕을 한 바가지로 얻어 잡숫게 되었구만.
- 그런셈이지.
-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일까?
그러게, 왜 이런 일이 근절되지 않는 것일까. 버스를 평생 애용하다가 이제 몸이 불편해지신 분들에게 표창을 주지 못할 망정 어찌 짐짝 취급을 할까. 서민이 압도적으로 이 세상을 가득체우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어째서 약자인 자신이 약자인 타인을 업신여기는 일을 서슴치 않는 것일까. 그녀들이 고생해서 자식들을 출가시키면 그들은 절대 어머니에게 차를 선물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서민으로 살면서도 2000cc이상의 차를 폼나게 타고 다닐 꿈에 젖어 살지만 그가 지금 타고 다니는 1300cc 자동차를 위해 밤 낮으로 자기 부인과 자식들 엄마와 장모가 버스나 지하철로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을 왜 망각하는 것일까.
- 버스기사는 화를 내고 있는거야.
- 화?
- 이른 바 좆빠지게 일해봐야. 별로 보람은 없고 세상 살기는 더욱 빡빡해지잖아. 그러면 사람들은 그 분노를 어딘가로 분출해야만 해. 그것이 지나치면 사이코패스가 되고 그러면 살인도 하지. 그렇지만 대개의 피플들은 자제심을 가지고 살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야. 그래서 좀 더 교묘한 방법을 찾지. 감옥에 가지 않고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말이야. 그것이 바로 자신보다 더욱 약자를 괴롭히는 것이지. 강자에게 성내봐야 돌아오는 것은 더욱 큰 치도곤뿐이야. 억울함을 호소하러 관가에 가 보았자 볼기만 맞고 집까지 기어오는 것이 서민이야, 약자지. 그런 사람들이 어디가서 하소연을 하겠어. 바로 가까운 곳에 대상이 있잖아. 힘없는 소녀, 아가씨, 할머니등이지. 함부로 해도 볼기를 맞을 염려가 없어. 손만 안대면 얼마든지 스트레스를 풀 수 있어. 나는 그런 광경을 무수히 봐. 어떤 할머니가 버스에 간신히 타서 이 버스 청량리 가냐고 외쳐. 그럼 기사는 몹시 귀찮다는 듯이 안가요! 하고 뻐대지. 그럼 당황한 할머니가 그럼 제기동은요? 하고 묻지.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는 거야. 아니 할머니는 눈이 없어요? 위에 노선도 있잖아요. 그걸 보시면 되잖아요. 참 나. 자꾸 말시키시면 안전운전에 지장이 옵니다. 네? 하고 말이야. 스트레스는 해소된거야. 할머니는 여정히 안개속을 걷는 거고. 버스 기사는 자신의 임무가 난폭운전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아침에 자신의 아내에게 배웅을 받으며 나오면서 하루에 몇번의 신호위반을 해치울까만 생각하는 것이지. 그들은 할머니따위가 길을 묻는 이유를 알지 못해. 소녀시대부터 버스회사에 사태업자에게 일수찍듯이 꼬박꼬박 푼돈을 바쳤는데 늙어버리니 그런 고마움을 알아주기는 커녕 오회려 더욱 무시를 당해. 그 남자의 머리속엔 미친소정국을 타계할 구국의 마음이 불타고 있어. 할머니 따위는 돈 벌어서 택시를 타고 다니면 그만이야. 내 월급은 회사와 서울시에서 주는 것이지, 장애인이나 할머니 따위가 아니야. 그런 것이지.
- 왜 그래? 당신도 어머니때문 속상했어?
- 하하. 아니 어머니 때문은 아니지만 버스를 타면 늘 속상하지.
- 웃기는 것을 하나 추가해줄까?
- 뭔데?
- 울 엄마는 설상가상으로 시력이 몹시 좋지 않다는 점이지. 노선도의 깨알같은 글씨는 커녕 버스에 새겨진 번호도 간신히 보일정도거든.
- 그래.
- 왜 이렇게 각박해진걸까.
- 글쎄. 왜일까.
약자가 약자를 보듬지 않으면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는 법이다. 시민이 연대해서 엉망이된 정국을 타파하는 것처럼, 그 시민 그 연대로 사회적 약자를 품에 안을 순 없는 것일까. 버스에서 노인들이 그런 취급을 받을 때 그 누구 하나 버스회사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고기파동은 내겐 가슴아프지만 너무 멀다. 노인이나 장애인으로 한정지어진 불합리나 차별엔 침묵을 지키던 시민들이 자신의 건강과 직접 연계된다고 생각하니까 분기탱천해 버리는 작금의 시대는 사실 내게 너무 먼 나라의 풍경같다.
소소한 시민들의 정의가 하나로 뭉쳐지면 올바른 시민의식이 정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수의 정의는 늘 다수의 이익에만 치우쳐 있음이 아쉽다. 모처럼 모아진 다수의 힘이 아무리 모아도 다수의 힘을 낼 수 없는 우리네 이웃들에게도 나누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지나친 것일까.
난폭운전자 버스노선 버스회사 처벌을 위한 촛불집회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 노인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새력들은 결국 우리자신인 것이다. 물론 내가 특정 버스기사를 나무랐다고 해서 내가 그 나무람의 궁극적인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다만 청계광장까지 나갈수도 없는 사람들에게도 다수의 시선이나 논리를 나누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정부가 수입하는 음식이 결국 소수의 정책입안자보다 다수의 시민들에게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했기에 청계광장은 열기가 가득해졌다. 고유가다 음주운전을 피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하루 이틀 버스를 이용한 30대 이상 남성들의 불만이 그곳에 없다고 해서 평생동안 버스를 이용해 결국 이제 늙어 노인이 된 사람들을 함부로 여길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자가용을 굴리기 위해서 아내와 할머니들이 수십년을 버스만 타고 다녔던 것을 왜 늘 외면하는 것일까.
나로선 그런 것들이 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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