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정오쯤 슬슬 눈을 뜬 나태한 인간 나, 심심풀이 땅콩과도 같은 글을 쓰고자 기꺼이 블로그에 접속을 시도했던 것. 간혹 인터넷이라는 바다를 서핑하다보면 눈과 귀를 몹시 곤란하게 하는 문구들을 보게 된다. 내가 어째서 그러한 문구들을 싫어하는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래 글귀들의 나열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논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좁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지극히 지엽적인 꼬투리라는 점이다.



1. 필자 者 는 무슨 얼어죽을.

필자가 알아 본 바에 의하면, 필자가 사는 동네에선, 필자가 속한 IT 관련 어쩌구. 왜 이렇게 나는 필자라는 단어를 싫어할까. 마치 이웃집에 살면서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덩치 큰  bully를 연상시킨다. 주는 것 없이 밉다. 사사건건 문장에 시비를 건다.

내가 '필자'라고 하는 말 자체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필자라는 말이 풍기는 고급적 수사때문일테다. 가령 필자라고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것은 필 즉, 글을 한자화하여 결국 글쓴이를 성역화하는 자기배려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금은 사대부주의자적 냄새도 풍기고 이를테면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보여서 싫다. 또한 필자라 함은 내가보다 훨씬 객관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필자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글을 읽어보면 대개 허접하다 못한 단 10초도 읽어주기가 괴로울정도로 내용이 빈약하거나 부실하거나 또는 자신을 객관화한 이유가 전무한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예를 들 수는 물론 없다. 그것은 그 작자들과의 소모적인 개싸움을 유발할 가능성만을 키우기 때문이다!)


2. 개인적으로. 같은 소리하고 있네.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는 개인적으로 너무 지루하다. 옆의 문장을 보자. 로베르 브레송이야 원래 지루한 프랑스 감독이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라 좀처럼 영화관에서 졸지 않는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어떤 변태적인 영화평론가나 그들의 추종자들에겐 상큼한 영화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글쓴이(또는 필자, 그렇다. 필자는 제3자가 글쓴 이를 지칭할 때 써야 적절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필자라고 스스로 언급하는 것은 나 자신을 타인에게 반드시 인간이라고 불러달라는 것만큼 으스스하다!) 는 그것을 개인적으로 보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보아라. 개인적인 글을 쓰면서 구태여 개인적으로라고 말할 필요가 있는가? 인간은 어떤 단체나 집단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글을 제외한 모든 글은 그저 1개 인간이 지극히 개인적인 글을 쓰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개인적이라는 표현은 동어반복이다.

앞의 문장을 다시 끌어다 써보자.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는 개인적으로  너무 지루하다. 어떤가. 개인적으로를 제거 하고나니 문장이 슬림해졌다. 그렇다고 이 다이어트한 문장을 어느 누가 읽는다고해도 사회적으로 약속된 민중의 대표성을 띈다고 보지 않는다. 그저 개인적인 고집이나 생각일 뿐이라고 믿는다. 개인적으로라는 말은 글쓴이의 사견임을 강조하는 행태의 표현이다. 그러나 사견을 나타내는 100%의 문단속에서 구태여 한 문장만을 사견임을 내세우는 것은 역시 코미디일 뿐이다.

지금까지 내가 써 내려온 이러한 글들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다. 하지만 나는 구태여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라는 말이 들어간 문장을 싫어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글을 읽는 인간들이라면 모두 글의 버트의 개인적인 생각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우리

어느 날 식당에서 나이 제법 지긋한 직장동료에게 물었다. "와 그래요? 그걸 한 번에 다 드신단 말이에요?" 그러자 그는 내가 예상한대로 다음과 같이 지껄이는 게 아닌가.

"우리는 원래 쪼잔하지 않아. 우리는 늘 그렇게 먹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식당엔 나와 그 직장동료를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식탁에 아는 사람이라곤 마주 보고 있는 나와 김과장 (편의상 과장이라고 하자) 뿐이었다. 기가막힌 노릇이이었다. 둘 중 하나가 자신을 지칭하는데 우리라고 한다?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혹시 유령? 김과장은 유령을 몰고 다니는 유령치기인가? 나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들은 한국사회에 얼마든지 있다. 그 우리라는 테리토리에 대체 어떤 인간들을 포함해서 이야기하는지 모르지만 질문을 받은 사람 단 1명만이 존재할 때도 그가 속한 어떤 (나는 알지 못한다 물론 그것이 어떤 속성을 가진 집단을 말하는지) 집단을 늘 대표하는 그 대표성에 혀를 내두르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물어 본 적이 있다. 우리? 누구? 당신과 또? 하지만 밥만 우물거리며 얼렁뚱땅 넘어가는 김과장의 눈에는 핀잔이 가득했다. 따지긴 씹세. 밥이나 퍼먹지. 걍. 하는 시큰둥한 얼굴을 나는 놓치지 않는다.

나는 이들이 두렵다. 늘 자신을 우리라고 1인칭 복수화하는 인간들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엔 물론 내가 포함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우리에 내가 포함하지 않는 것은 사실 어찌보면 매우 고맙고 즐거운 노릇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김과장이 거래처에서 다른 상대와 이야기할 때 회사 전체를 대표한다는 발언으로 우리는 납품을 꼭 지킵니다. 라고 하지 않을까? 그 우리 안에 같은 회사 직원인 나는 불포함되어 있을까? 그 우리가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한 우리라 나는 반발하지 못한다. 하지만 식사중 그가 지칭한 우리는 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의 고향 사람들? 가족? 그의 동향 친구들? 그들은 그가 서슴없이 그들을 한데 모아 우리라고 상황에 따라 들어내는 것에 동의했을까?

자고로 나를 우리라고 표현하는 사람이야말로 지신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곤란한 족속일 가능성이 높다. 자기 자신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후지거나 또는 처진다고 느끼고 있기에 스스로를 집단화하면서 자신에게 집단만이 누릴 수 있는 다수의 힘을 끊임없이 부여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에게 대표성을 주지 않았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가 맘대로 임명장을 받아쥐고 집단화한 무리의 대표성을 갖게 됨으로서 그가 하는 말이 개인이 아닌 단체적 성격을 띄게 된다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그것은 곧 사람의 말이 엄청난 객관성을 갖게 되고 따라서 자신이 내 뱉은 가벼운 문장 한마디마저 높은 신뢰를 발산해 상대방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로선 이렇듯 나를 우리라고 표현하는 인간들과 말을 섞을 때 금방 문장이나 대화의 진실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그가 지칭한 '우리'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음을 다시한번 감사하며 덕분에 그를 진지하게 1명의 인간으로 대하지 않아도 되었음에 무척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나는 1대1을 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수를 대표하지 않는 1인에게만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쓸데없이 길어졌다. 나머지는 나중에 마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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