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탕에 커서가 깜빡인다.
무엇인가 토해내야 하는데 속은 막혀 있다.
답답하다.
무엇 하나 나를 둘러 싼 것들에 대해 확답을 할 수 없다.
염천 속에 잡은 핸들이 쉽사리 미끄러진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굵은 땀들이 허리춤에서 속옷으로 빨려 들어간다.
덥다.
여름이다.
나는 여름이 좋다.
매년 여름소녀를 기다린다.
여름소녀는 원피스차림으로 내게 다가온다.
매년 이 맘 때 찾아온다.
그리고 다정한 손길로 어김없이 한 살을 더 먹게 되는 나를 위로 한다.
너는 아직 그대로야. 그렇게 속삭이듯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다.
올해는 어쩐지 여름소녀와의 조우가 낯설다.
- 있잖아. 기다렸어?
- 아니.
- 왜?
- 모든 게 예년 같지가 않아.
- 나도?
- 너도.
예년 같지 않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남기는 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 전의 나는 덥디 더운 한 낯의 햇살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썬블럭을 바르지 않고는 출근하기가 두려워진다.
왜일까.
- 에피소드가 쌓이면 나중에 행복해질 줄 알았어.
- 어째서?
- 할 이야기를 쌓아두면 노년이 덜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거든. 도토리를 자신만 아는 창고에 부지런히 저장해둔 다람쥐처럼 그래서 나 역시 부지런히 추억을 모았지.
슬프다.
에피소드는 창고에 한 가득 쌓여있는지 몰라도.
어쨌거나 지금의 나에겐 저장은 무의미해.
-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
- 도움 따윈 필요 없어. 내겐 그저 대화 상대가 필요할 뿐이니까.
- 다람쥐는 자신이 저장해 둔 저장창고의 대부분을 잊어 버린 데.
- 왜?
- 만일을 위해 너무 많은 곳에 묻어둔 게 화근이 된 거야. 식량을 구하는 것만큼 일일이 그것을 쌓아두는 창고를 기억하는 일도 어려운 법이야.
- 적어두면 좋았을걸.
- 하지만 다람쥐는 글을 몰라.
- 하긴.
절망이다.
애초에 그럴 거면서 무엇 하러 그렇게 많은 도토리를 땅에 묻어 두었을까.
망각이다.
망각은 절망을 부른다.
지나간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면 다람쥐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내게도 지금 찾지 못해 쓸모 없어지는 에피소드들이 너무 많다.
시간이 갈수록.
- 그럼, 찾지 못하는 도토리들은 어떤 운명에 처하는 건데.
- 운명? 거창하네. 하긴, 씨앗이란 인간의 입안으로 들어가거나 땅 속에서 썩어버리는 거겠지. 그래도, 녀석들이 찾지 못해 땅속에서 조용히 겨울을 보낸 도토리는 싹이 돋게 되지. 새 생명 말이야. 그것 중 몇몇은 자연의 법칙에서 살아남아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게 되는 것일 테고
- 아, 다 썩어버리지 않는구나.
- 다는 아니야.
- 그 중 몇은 싹을 틔우는 거구나.
- 그. 중 몇몇은.
-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쌓아둔 추억들도 다 썩어버리진 않겠구나.
그것들 중 몇몇은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내 상상력에 도움을 줘
얼마 남지 않은 노년에 활기를 줄지도 모를 일이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
-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여름소녀는 늘 같은 차림이다. 푸른색 아이리스가 프린트 된 흰 바탕의 원피스 차림.
오래 입어 적당히 빈티지하게, 적당히 프린트가 지워진.
- 너는 매년 여름에 내게 찾아 올 거지?
- 네가 원한다면.
- 이봐, 나는 단 한번도 네게 찾아오라고 부탁한적이 없어.
- 계절은 네 부탁 따위로 오고 가지 않아.
-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고?
- 때가 되면 오는 거야. 때가 되면.
- 그럴 테지.
답답한 마음은 그대로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생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것이 시간이 주는 매력이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시간만이, 시간이 주는 세월만이 유일하게 공평하다는 것을.
- 또 만날 수 있을까?
- 이제 겨우 초여름이야.
- 그래도 가을이면 사라질 테지?
- 여름은 길어. 앞서지 않아도 돼.
-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만나?
- 아니.
- 어째서?
- 대개의 인간들은 내 존재조차를 알지 못해.
- 어째서지?
- 상상력의 범위는 의외로 좁아. 공유하려는 시도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 적어도 너 하나만은 독점할 수 있는 셈이구나.
- 그래.
무엇 하나 선점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이렇게 싱그러운 소녀를 매 여름마다 독점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을 일인가.
나는 그녀가 내 삶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내게 희망을 던져 주길 기대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래, 여름은 이제 막 시작이다.
바보 다람쥐녀석이 작년에 묻어둔 랜덤 도토리는 벌써 싹을 틔워 뿌리를 내린 지 오래다.
나는 즐겁고 싶다.
그게 그저 내 인생의 목표다.
즐겁게 사는 것.
왜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왜일까.
그것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래. 상담하자.
나는 눈을 뜨고 흰색 원피스의 소녀를 찾는다.
무엇인가 토해내야 하는데 속은 막혀 있다.
답답하다.
무엇 하나 나를 둘러 싼 것들에 대해 확답을 할 수 없다.
염천 속에 잡은 핸들이 쉽사리 미끄러진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굵은 땀들이 허리춤에서 속옷으로 빨려 들어간다.
덥다.
여름이다.
나는 여름이 좋다.
매년 여름소녀를 기다린다.
여름소녀는 원피스차림으로 내게 다가온다.
매년 이 맘 때 찾아온다.
그리고 다정한 손길로 어김없이 한 살을 더 먹게 되는 나를 위로 한다.
너는 아직 그대로야. 그렇게 속삭이듯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다.
올해는 어쩐지 여름소녀와의 조우가 낯설다.
- 있잖아. 기다렸어?
- 아니.
- 왜?
- 모든 게 예년 같지가 않아.
- 나도?
- 너도.
예년 같지 않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남기는 긴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 전의 나는 덥디 더운 한 낯의 햇살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썬블럭을 바르지 않고는 출근하기가 두려워진다.
왜일까.
- 에피소드가 쌓이면 나중에 행복해질 줄 알았어.
- 어째서?
- 할 이야기를 쌓아두면 노년이 덜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거든. 도토리를 자신만 아는 창고에 부지런히 저장해둔 다람쥐처럼 그래서 나 역시 부지런히 추억을 모았지.
슬프다.
에피소드는 창고에 한 가득 쌓여있는지 몰라도.
어쨌거나 지금의 나에겐 저장은 무의미해.
- 도움이 되진 않겠지만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
- 도움 따윈 필요 없어. 내겐 그저 대화 상대가 필요할 뿐이니까.
- 다람쥐는 자신이 저장해 둔 저장창고의 대부분을 잊어 버린 데.
- 왜?
- 만일을 위해 너무 많은 곳에 묻어둔 게 화근이 된 거야. 식량을 구하는 것만큼 일일이 그것을 쌓아두는 창고를 기억하는 일도 어려운 법이야.
- 적어두면 좋았을걸.
- 하지만 다람쥐는 글을 몰라.
- 하긴.
절망이다.
애초에 그럴 거면서 무엇 하러 그렇게 많은 도토리를 땅에 묻어 두었을까.
망각이다.
망각은 절망을 부른다.
지나간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면 다람쥐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내게도 지금 찾지 못해 쓸모 없어지는 에피소드들이 너무 많다.
시간이 갈수록.
- 그럼, 찾지 못하는 도토리들은 어떤 운명에 처하는 건데.
- 운명? 거창하네. 하긴, 씨앗이란 인간의 입안으로 들어가거나 땅 속에서 썩어버리는 거겠지. 그래도, 녀석들이 찾지 못해 땅속에서 조용히 겨울을 보낸 도토리는 싹이 돋게 되지. 새 생명 말이야. 그것 중 몇몇은 자연의 법칙에서 살아남아 커다란 나무로 성장하게 되는 것일 테고
- 아, 다 썩어버리지 않는구나.
- 다는 아니야.
- 그 중 몇은 싹을 틔우는 거구나.
- 그. 중 몇몇은.
- 그렇구나.
그렇다면 내가 쌓아둔 추억들도 다 썩어버리진 않겠구나.
그것들 중 몇몇은 지면에 뿌리를 내리고 내 상상력에 도움을 줘
얼마 남지 않은 노년에 활기를 줄지도 모를 일이다.
희망은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
-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여름소녀는 늘 같은 차림이다. 푸른색 아이리스가 프린트 된 흰 바탕의 원피스 차림.
오래 입어 적당히 빈티지하게, 적당히 프린트가 지워진.
- 너는 매년 여름에 내게 찾아 올 거지?
- 네가 원한다면.
- 이봐, 나는 단 한번도 네게 찾아오라고 부탁한적이 없어.
- 계절은 네 부탁 따위로 오고 가지 않아.
-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고?
- 때가 되면 오는 거야. 때가 되면.
- 그럴 테지.
답답한 마음은 그대로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생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것이 시간이 주는 매력이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시간만이, 시간이 주는 세월만이 유일하게 공평하다는 것을.
- 또 만날 수 있을까?
- 이제 겨우 초여름이야.
- 그래도 가을이면 사라질 테지?
- 여름은 길어. 앞서지 않아도 돼.
-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만나?
- 아니.
- 어째서?
- 대개의 인간들은 내 존재조차를 알지 못해.
- 어째서지?
- 상상력의 범위는 의외로 좁아. 공유하려는 시도도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 적어도 너 하나만은 독점할 수 있는 셈이구나.
- 그래.
무엇 하나 선점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이렇게 싱그러운 소녀를 매 여름마다 독점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을 일인가.
나는 그녀가 내 삶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내게 희망을 던져 주길 기대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래, 여름은 이제 막 시작이다.
바보 다람쥐녀석이 작년에 묻어둔 랜덤 도토리는 벌써 싹을 틔워 뿌리를 내린 지 오래다.
나는 즐겁고 싶다.
그게 그저 내 인생의 목표다.
즐겁게 사는 것.
왜 그게 그렇게 어려울까.
왜일까.
그것에 대해서 물어보자. 그래. 상담하자.
나는 눈을 뜨고 흰색 원피스의 소녀를 찾는다.
태그 : 여름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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