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s the DAZIZIMA? |
by dAzizima |
밍크코트란 제목은 트윗에서 줏어 들었다. 영화 안 본지 1년은 지났다. 간소한 차림으로 두 세명이서 엔딩롤까지 차분하게 감상할 수 있는 극장이 사라졌다. 내 가슴 안에 열정도 세인트 엘모의 그것처럼 덩달아 사그라 들었다. 맥스무빙하니 예전에 여성인권영화제가 열렸던 곳에서 하루 2차례 상영중이었다.
3D에 디지털 아이맥스를 사랑하는 친구 R이라면 정색을 했을 작은 스크린 맨 뒤에 관객 예닐곱이 흩어져 앉았다. 여자 황정민의 연기는 소름 끼칠 정도는 아녔다. 외려 그들 전부가 인상깊었다. 인디비줠이 아닌 몹씬이 빛을 바란다는 것은 타이틀롤 개인의 힘이 아니다. 단체의 힘이다. 이런 게 영화다 싶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국산 테레비 드라마를 본 게 언젠였던가 기억해 냈다. 양동근이라는 배우가 나왔던 인정옥 작가의 엠비씨드라마였던것 같다. 가장 좋았던 드라마를 마지막으로 왜 더 테레비를 기대하지 않았던가. 드라마가 허구임을 알고 본다지만 그래도 제법 있을법한 스토리를 쳐대야 보면서 맛장구를 처줄것 아니냐 싶었을까. 내겐 2층집에 살면서 아줌마를 외치며 9첩반상을 세팅한 밥상에 카메라에 거슬리지 않게 물구나무선 디귿자로 앉아 자식들의 혼사문제를 밀고당기는 이야긴 최루탄이 종로를 누비던 80년대말, 헐리우드 극장앞 돼지고사머리집에서 소주와 국밥을 앞에 두고 읽었던 일본작가의 양사나이보다 낯설었다. 그게 결별의 이유였다. 그 후 나는 조금씩 왕따가 되었다.
시청자를 멍충이로 만드는 똑같은 내러티브가 마뜩잖았다고 해서 드라마를 영원히 기피했던 것은 아니다. 요컨대 실버스크린에서 그러한 갈증을 메꾸곤 하렸으니까. 친구들의 비난을 뒤로하고, 작은 스크린을 찾아 다니며 홍상수와 이윤기따위로 테레비에 대한, 드라마의 향수를 달랬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여태 내가 지껄인 내용 그대로다. 말하자면, 사실을 왜곡하는 이기적인 인디뷔절들이 혈연을 저당잡혀 개인과 세대를 희생하는 집단에 가깝다. 어린시절이 양익준의 똥파리만큼 부박했기에 불혹에 이르러서도 사회가 권장하는 가족을 이룰수가 없었던 사람에게는 더더욱 이 영화가 절묘하다.
이 영화의 여러 단점중에 가장 돋보이는 게 있다면 바로 그것일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등장말이다. 21세기 특히 이 각박한 대한(민)국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 접속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해피엔딩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담고 있는 이음절은 바로 한국적 SF의 현재다. 드라마에 클리셰를 제거하려면 SF를 빼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신 그렇기때문에나 적어도 그러므로를 써야 마땅하다. 그게 드라마다. 해피엔딩은 영화적 수사이고 불필요하다. 관객에게 맡겼으면 110점이었을 영화다. 딱, 그것만이 아쉬웠던 (싸구려 영화이기에 기술적인 것은 차치하고) 영화였다.